시리즈 「법을 다루는 사람들: 정의론으로 읽는 한국 사법」 1편. 사실 보도에 평가를 더한 해설 기사다.
한눈에 보기
법은 스스로 집행되지 않는다. 법철학자 H.L.A. 하트는 법조문에는 언제나 해석이 필요한 '열린 구조'가 있어 판단하는 사람의 재량이 들어간다고 했다(『법의 개념』, 1961). 로널드 드워킨은 그 재량이 같은 사안을 같게 다루는 일관성, 곧 '통합성'에 묶여야 한다고 봤다(『법의 제국』, 1986). 정의가 실제로 실현되는지는 결국 법을 다루는 사람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한국 사법에서 그 '사람'의 영향이 가장 크게 모이는 자리가 대법원장이다. 2023년 12월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그 국감에서 다뤄진 대법관 재제청 갈등, 전원합의체 일정, 업무추진비는 모두 대법원장 한 사람이 쥔 권한에서 나온 문제다. 이 글은 그 권한이 무엇이고,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를 어떻게 썼으며, 결과가 무엇을 바꿨는지 살핀다.
대법원장 한 사람에게 모인 권한
- 권한 · 근거 · 영향
- 대법관 제청 · 헌법 104조 2항 · 대법원 구성, 곧 앞으로의 판례 방향
- 헌법재판관 3명 지명 · 헌법 111조 3항 · 헌법재판소 구성
- 중앙선거관리위원 3명 지명 · 헌법 114조 2항 · 선거관리 기구 구성
- 전원합의체 재판장 · 법원조직법 7조 1항 · 중대 사건을 언제, 어떻게 판단할지
- 사법행정 총괄 · 법원조직법 9조 1항 · 법관 인사, 예산, 법원행정처 운영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아홉 명 가운데 한 표를 가진 대법관이고, 다른 대법관을 고를 권한이 없다. 한국 대법원장은 대법관 후보를 고르는 제청권과 사법행정 전체를 함께 쥔다. 이 자리에 누가 앉느냐가 사법의 결과를 크게 좌우하는 이유다. 각국 비교는 3편에서 다룬다.
1. 무엇을, 언제 판단할지: 같은 전원합의체, 다른 속도
조희대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재판장으로 이끈 두 사건은 처리 속도가 크게 달랐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은 2025년 3월 28일 대법원에 접수된 뒤 34일 만인 5월 1일 전원합의체가 10대 2로 유죄 취지 파기환송했다.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서울신문).
한덕수 전 국무총리·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의 내란 사건은 2026년 8월 5일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대법원은 "국민적 관심도가 매우 높고 역사적으로 사법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MBC). 첫 심리는 9월 29일에 열렸고, 특검법이 정한 "항소심 선고 후 3개월 내" 선고 시한은 이미 지났다. 선고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두 사건은 쟁점과 기록의 양이 달라 걸리는 시간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올리는 시점과 심리 일정은 법조문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다. 드워킨의 통합성 기준에 따르면, 어느 사건은 서두르고 어느 사건은 늦춘 이유를 그 판단을 내린 사람이 같은 원리로 설명할 책임이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국감에서 이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다.
2. 누가 대법관이 될지: 제청권과 공석
조희대 대법원장은 8월 18일 노태악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제청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청와대는 8월 28일 임명동의안 제출을 보류하고 다른 후보를 제청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 대법원장은 9월 22일 "재제청 요청에 응할 수 없음을 밝힌다"고 했고, 청와대는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임명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반박했다(한국일보).
조 대법원장은 국감에서 청와대 공문에 "구체적인 사유와 헌법적 근거가 명확히 기재돼있지 않다"고 했고, "대법관 공석이 장기화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MBC). 청와대 강유정 대변인은 10월 7일 "별도 입장이 없다"고 했다.
갈등은 10월 15일 법제처 국감으로 번졌다. 조원철 법제처장은 대법원장의 제청을 "일종의 추천, 그리고 제안의 의미"로 규정하고 "제청에 대통령이 기속돼서 제청된 후보자를 반드시 임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제청권을 행사하지 않아 대법원 구성과 운영에 차질을 빚는 것은 "대법원장이 헌법상의 책무를 다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답했다(YTN). 이성윤 민주당 의원은 "225일째 대법관을 제청하지 않고 있다. 직무유기 아닌가"라고 했고, 김의겸 법사위 민주당 간사는 "형법상의 직무유기까지 갈 수 있다", "탄핵하고 연결이 된다"고 했다. 박형수 법사위 국민의힘 간사는 "마음에 드는 사람 제청할 때까지 계속 반려하면 제청권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법제처장의 답변이 "대통령과 너무 닮았다. 사설 변호인이냐"고 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탄핵 사유나 헌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맞섰다(이데일리). 제청권의 성격을 어떻게 읽느냐가 곧 탄핵 사유인지 아닌지로 이어지는 셈이어서, 26일 법사위 종합감사에서도 같은 공방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대법관 한 명이 누구냐는 판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2편에서 다루듯, 같은 공직선거법 조항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0년 7대 5로 무죄 취지, 2025년 10대 2로 유죄 취지로 판단했고, 그사이 대법관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 제청권이 정치적 다툼의 한복판에 서는 이유다.
조 대법원장의 퇴임은 2027년 6월로 보도됐다(Korea Times). 2월 국회를 통과한 대법관 증원(14명에서 26명으로)은 2028년부터 이뤄지므로, 늘어나는 대법관은 그의 후임이 제청하게 된다. 지금의 제청 갈등은 조 대법원장이 남은 임기 동안 어떤 대법관을 남기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석이 길어지는 동안 대법관 한 자리가 비고, 그만큼 사건 처리가 늦어진다. 시민의 재판받을 권리라는 실질적 정의 기준에서, 교착을 푸는 일은 제청권을 가진 조 대법원장과 임명권을 가진 이재명 대통령 모두의 몫이다.
3. 권한에 따르는 설명: 선서 거부와 업무추진비
법사위는 9월 28일 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 주도로 조 대법원장을 일반증인으로 채택했다. 국민의힘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아이뉴스24). 그동안 대법원장은 국감에서 인사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조 대법원장은 10월 6일 출석했지만 "삼권분립·사법부 독립 원칙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 "대법관 제청에 관한 증언을 요구하고 있어 응하기 어렵다"며 선서를 거부했다(서울경제).
사법부 독립은 판사가 외부 압력 없이 재판하도록 보호하는 원칙이다. 대법관 제청은 재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쥔 인사권의 행사다. 권한이 클수록 그 권한을 어떻게 썼는지 설명할 책임도 커진다. 선서 없이 인사말과 일부 답변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그 책임을 직위의 관례 뒤로 물린 것이다.
업무추진비 문제도 같은 구조다. 이성윤·김현정·김동아 민주당 의원은 대법원의 고가 식사, 1억800만 원어치 와인 구매, 참석자 부풀리기 의혹을 제기했다. 조 대법원장은 "저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면서도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행정처에서 시정하겠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고 했다(서울경제).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인정한 사안이다. 공금 사용은 사법부 독립과 무관한 영역이어서 책임성 기준이 그대로 적용된다.
4. 국감 공방이 놓친 것
국감과 그 주변의 말은 사람의 권한 행사보다 진영의 언어로 흘렀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재제청 거부에 "본질적인 내란적 성격"이 있다고 했다(노컷뉴스).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은 대법원장의 이석을 막은 것을 "체포하고 감금하는 행위"라고 했다(세계일보). 손솔 진보당 의원은 "제2의 윤석열을 꿈꾸는 것인가"라고 물었다(노컷뉴스).
이런 말들은 어느 진영이 옳은가를 다툴 뿐, 한 사람이 쥔 권한을 어떻게 썼는지는 묻지 않는다.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어떤 사건은 34일 만에 판단하고 어떤 사건은 시한을 넘기는가, 제청한 후보를 왜 그 사람으로 골랐는가, 공금은 어떻게 쓰였는가.
정리
대법원장이라는 자리는 대법원 구성, 중대 사건의 일정, 사법행정을 한 사람에게 모은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 2025년 선거법 사건의 신속한 판결과 이번 제청이 그 예다. 반면 행사한 권한을 설명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선서 거부, 전원합의체 일정에 대한 침묵, 업무추진비가 그 예다.
정의론의 관점에서 문제는 어느 진영의 대법원장이냐가 아니다. 이만큼 큰 권한이 한 사람에게 모여 있는데, 그 권한을 어떻게 썼는지 설명하게 만드는 장치가 약하다는 데 있다. 같은 법이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적용되는지는 2편에서 다룬다.
확인할 점
- 국감 회의록이 아직 게시되지 않아 국감 발언은 언론 보도로 확인했다.
- 법원행정처가 다른 대법관 후보자들에게 사퇴를 권유했다는 의혹은 주장만 있어 다루지 않았다.
- 국민의힘이 청구한 헌법재판소 권한쟁의심판 결정과 10월 26일 법사위 종합감사가 남아 있다.
시리즈 「법을 다루는 사람들」
- 1편: 조희대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들…국감이 드러낸 대법원장 직위의 무게(이 글)
- 2편: 같은 법, 다른 판사…재판장 이름에 따라 갈린 형량과 판단
- 3편: 로버츠, 브리그스, 이마사키, 그리고 르펜의 두 재판장…해외에서도 판결은 사람을 따라 움직였다
- 4편: 커뮤니티는 조희대를 어떻게 봤나…진영에선 갈렸고, 공금 앞에선 같았다
갱신 기록
- 2026-10-16: 10월 15일 법제처 국감의 재제청 공방(법제처장 "헌법상 책무" 답변, 민주당 탄핵 거론, 국민의힘 반박) 추가
출처
- 대한민국헌법 — 국가법령정보센터
- 법원조직법 — 국가법령정보센터
- 이재명 선거법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 — 서울신문
- 한덕수·이상민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 — MBC
- 조희대 대법원장 국감 인사말 — MBC
- 청와대, 재제청 거부 반박 — 한국일보
- 법제처 국감도 조희대 공방…"탄핵 사유"·"독단 해석" — YTN
- 법제처 국감서도 '조희대 공방전'…"직무유기"vs"입법 독재" — 이데일리
- Cheong Wa Dae, top court clash over justice nomination — Korea Times
- 법사위, 대법원장 일반증인 채택 — 아이뉴스24
- 대법원장 선서 거부와 업무추진비 답변 — 서울경제
- 김민석 대표 '내란 잔불' 발언 — 노컷뉴스
- 국감 이석 관례 충돌 — 세계일보
- 국감 발언 공방 —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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